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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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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통제영

여수는 조선 최초 3도수군통제영지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水軍)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 종2품 관직으로 지휘 관청은 3도수군통제영으로 약칭은 통제영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조선 최초의 3도 수군통제사이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 1593년 8월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는다. 직책상 수군 총사령관이며 당시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이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최초 승격 설치된다. 그의 정식 직함은 전라 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다.

통제영에서 통제사를 보좌하는 아래 관직은 정3품 우후이다. 정3품은 좌수사와 같은 직급이나 이순신 장군이 좌수사를 겸하는 까닭에 우후라는 직책으로 통제영에서 부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여수에 설치된 통제영은 임진왜란 종전 3년 뒤인 1601년까지 9년간 존속하다. 당시 거제에 있던 경상우수영으로 통제영이 옮겨간 이래 경상 우수사가 통제사를 겸한다.

본영이 이관된 여수의 통제영은 전라좌수영으로 환원되고 전국의 병영과 수영이 철폐 되는 1895년, 417년간의 기나긴 세월을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음은 3도수군통제영 산하 수군 절도영 (수영)
경상좌수영(부산 동래)

경상좌수영은 부산 동래현에 설치되었다. 1592년 임란 당시 박홍이 경상좌수사를 맡았지만 일본군에 의해 와해되고 임란이 끝날 때까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경상우수영(경남 거제=통영)

경상우수영은 거제에 있다가 1604년(선조 37년) 지금의 통영으로 옮겼다.
경상우수영은 1601년부터 여수에서 옮겨간 3도수군통제영으로 기능하였다. 임진왜란 종전 후 1602년부터 대부분 경상 우수사가 통제사를 겸임하였다.

전라좌수영(전남 여수)

1478년 성종 10년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설치되었다. 이충무공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받는다. 휘하의 행정구역으로 순천도호부, 낙안(순천)군, 보성군, 흥양(고흥)현, 광양현의 다섯 군현과 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의 5개 진지를 뒀다. 그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3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면서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이 조선 최초 통제영이 된다. 왜란 종전 뒤 이시언 통제사 겸 좌수사까지 통제영 본영으로 쓰이다. 1601년 경남 거제에 있던 경상우수영에 통제영이 이관되고 전라좌수영으로 환원된다.

전라우수영(전남 해남)

1465년 세조 11년 전라우수영이 해남에 설치된다. 임진왜란 당시 이억기가 전라 우수사로 재임하다 1597년 2대 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칠천량(거제)해전서 전사한다. 명량 해전의 주요 본거지로서 당시 조선 수군 군영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충청수영(충남 보령)

충청수영은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금의 보령지역이다. 1466년 세조 12년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청 수사는 정걸 장군이었다. 그는 권율이 지휘한 행주대첩 전투에 수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충청수사 최호는 부임 3개월 만인 칠천량 해전에서 숨을 거둔다.
후임으로 권준이 충청 수사를 맡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은 종식된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

1597년 7월, 조선 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칠천량(거제)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어이없고 황당한 패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 충청수사 등 최고 지휘관을 비롯한 해전 경험이 풍부한 수만 명의 수군 장졸이 목숨을 잃고 수백 척의 판옥선과 거북선 등의 군선이 격파 당하는 굴욕적인 패배였다. 이 해전 한 번으로 나라가 망할 뻔하였다.

3대 통제사가 된 춤무공 이순신은 남아있는 군선 12척으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며, 1598년 일본군을 몰아내고 7년간의 전쟁을 종식시킨다. 조선을 구한 그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